[블록미디어 양원모 기자] “원유 대금을 달러 스테이블코인 테더로 처리했으니, 곧 선적이 이뤄질 겁니다.”

폴란드 국영기업 관계자들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다. 2024년 1월, 베네수엘라 동부 호세(José) 원유 수출 터미널 앞바다. 초대형 유조선 세 척이 며칠째 빈손으로 정박해 있었다. 배를 빌린 폴란드 국영 에너지기업 오를렌의 스위스 자회사 오를렌 트레이딩 스위스(OTS)는 속이 타들어갔다. 약속한 베네수엘라산 원유가 한 달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

OTS는 두바이 업체 해넌 인터내셔널에 선급금 2억3000만달러(약 3192억원)를 지급한 상태였다. 해넌은 현지 중개업체를 거쳐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PDVSA에서 원유를 구매하려 했다. 하지만 대금 지급에 차질이 생겼고, 미국의 제재 재개 시점도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해넌 측은 직접 베네수엘라 현지로 향했다.

1월5일, 방탄 차량과 경호원을 대동한 해넌 측은 수도 카라카스의 한 호텔에서 현지 브로커를 만났다. 6000만USDT(약 833억원)에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키를 USB에 담아 건넸고, 같은 달 28일에는 한 이탈리아 식료품점에서 같은 브로커에게 5000만USDT(약 694억원)를 추가로 넘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원유는 오지 않았다. 유조선들은 선적 날짜조차 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렸다. 오를렌은 결국 2024년 선급금, 선박 비용 등을 포함해 OTS 거래와 관련한 약 16억즈워티(약 5848억원)를 손실 처리했다. 폴란드 원유 거래 역사상 최대규모의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오를렌에서 해넌으로 넘어간 석유 대금이 테더로 바뀌어 베네수엘라 브로커로 전달된 것 자체는 사실일까? 블록체인 상에 기록된 테더의 자금 흐름을 쫓다보면 돈을 다시 찾을 방법이 생길까? 폴란드 사법 당국은 이 사건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고 있다.

기회로 보였던 ‘제재 완화’

15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모든 일의 시작은 2023년 10월이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야당과 2024년 대선 조건에 합의하자 석유·가스 부문 제재를 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완화했다.

막혀 있던 원유 거래의 문이 일부 열리자 트레이딩 업체들은 값싼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확보하기 위해 앞다퉈 뛰어들었다. OTS도 그중 하나였다. OTS는 러시아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고 국제 원유 트레이딩 사업을 키우기 위해 오를렌이 세운 회사였다.

OTS가 거래 상대로 택한 곳은 해넌이었다. 설립된 지 2년 반 남짓 된 두바이의 소규모 트레이딩 업체였다. OTS는 2023년 11월 해넌과 베네수엘라산 중질유 약 600만배럴을 3억4500만달러(약 4789억원)에 공급받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 체결 닷새 만에 전체 금액의 3분의 2인 2억3000만달러(약 3193억원)를 선급금으로 송금했다. 담보, 은행 보증은 없었다.

결제 방식은 일반적인 원유 거래와 달랐다. 오랜 제재로 PDVSA가 달러 결제망에서 밀려나면서 현지에서는 원유 대금을 달러 가치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로 주고받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넌은 자신을 “PDVSA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한 인물이 운영하는 렉스코 에너지를 통해 원유를 확보하려 했고, 2023년 12월 골드마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에 3000만달러를 보냈다. 이를 USDT로 바꾼 뒤 렉스코를 거쳐 PDVSA에 전달할 계획이었던 것.

하지만 돈은 모종의 이유로 PDVSA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사이 원유 공급의 최종 기한인 12월19일이 지났다. OTS는 해넌을, 해넌은 렉스코를 재촉했다. 기존 경로로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해넌 측은 결국 이듬해 1월 카라카스로 향했고, 현지 브로커에게 직접 USDT를 건네기에 이르렀다.

선박 비용만 1000억원

그러나 현지 브로커는 1억1000만USDT를 챙긴 뒤 돌연 연락이 두절됐다. 중질유 확보가 어려워지자 OTS와 해넌은 다른 유종으로 눈을 돌렸다. 거래를 통해 해넌이 OTS에 진 채무를 줄이려는 시도였다.

1월26일 양측은 베네수엘라산 연료유 100만배럴을 거래하기로 했다. 해넌은 다른 브로커를 통해 물량 확보에 나섰다. 2월25일 1100만USDT를 건넸고, 3월8일에도 같은 금액을 추가로 지급했다. 해넌이 이를 통해 현지 브로커들에게 전달한 돈은 총 1억3200만USDT에 달했다.

OST는 같은 해 3월8일이 돼서야 유조선 한 척에 약 50만배럴의 연료유를 실을 수 있었다. 별도로 계약한 연료유 물량의 절반이었다. 당초 약속했던 중질유 600만배럴은 끝내 확보하지 못했다. 해넌이 브로커들을 전전하는 사이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배가 움직이지 않아도 용선료와 체선료는 계속 발생했다. OTS 내부 추산에 따르면 해넌과의 거래로 발생한 선박 관련 비용만 7200만달러(약 999억원)에 달했다.

OTS가 이 거래에서 기대했던 최대 이익은 3000만달러(약 416억원)였다. 그러나 이익은커녕 천문학적 손해만 떠안게 됐다. 결국 경영진이 교체된 OTS는 2024년 3월28일 해넌과 맺은 원유 공급 계약을 해지했다. 유조선들도 그제야 베네수엘라 해역을 떠났다.

전직 임원들 기소…해넌은 “반환할 돈 없다”

바르샤바 검찰은 지난달 7일 전직 오를렌·OTS 임원 3명을 기소했다. 회사 자산과 그룹의 이익을 보호·감독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다. 유죄가 인정되면 최대 징역 25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 검찰은 이들이 관여한 원유 계약 3건에서 발생한 피해액을 약 15억즈워티(약 5482억원)로 추산했다.

수사기관은 OTS가 보낸 돈으로 디지털자산을 사들인 과정과 이후 자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추적하고 있다. 자금 분석에는 폴란드 국내안보청과 사이버범죄 전담 수사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오를렌에서 해넌으로 돈이 흘러간 경로, 해넌에서 이 자금이 테더로 환전된 경위 등이 초점이다. 오를렌 또는 해넌의 누군가가 배달 사고를 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단 오를렌은 해넌에 건넨 선급금 2억3000만달러를 돌려받기 위해 중재 절차를 밟고 있다. 해넌은 OST와 현지 업체 간 원유 구매를 중개하는 역할만 맡았을 뿐, 원유 공급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맞서고 있다. 해넌을 대리하는 아부다비 법률회사 ADG리걸의 데이비드 매코이 변호사는 “해넌은 이 사안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오를렌과 건설적 대화를 나눌 의향이 있다”고 FT에 말했다.

해넌의 말이 맞다면, 해넌이 베네수엘라 브로커에게 넘긴 테더의 이동 경로가 블록체인 상에 기록 돼 있을 것이다. 폴란드 사법 당국은 이 흔적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