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상장사 실적이 급증하고 있지만 코스피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주가 상승폭이 실적 향상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향후 1년간 예상되는 기업 이익을 기준으로 산출한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1년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시장에서는 폭발적 성장세를 보였던 국내 상장사 이익이 향후 꺾일 우려가 시장에 반영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이 연일 코스피 시장에서 대규모 순매도세를 이어가며 수급 역시 주가에 부정적인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시장 밸류에이션이 낮아진 현 상황이 긴 호흡으로 볼 때 매수 적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12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41.69포인트(3.65%) 하락한 6384.24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일 7003.74였던 지수는 4거래일 연속 하락하며 8.85% 급락했다. 이날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는 4.39% 내린 25만500원, 2위 SK하이닉스는 4.28% 하락한 160만5000원에 마감했다. 반도체 투톱을 중심으로 외국인 매물이 쏟아지면서 낙폭을 키웠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8일 기준 코스피의 12개월 선행 PER은 5.11배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0월 말 11.30배에서 54.8% 하락한 것으로, 2025년 1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12개월 선행 PER은 현재 주가를 향후 12개월간 예상되는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지표다. 기업의 미래 이익 전망이 높아지거나 주가가 하락하면 낮아진다. 이미 확정된 과거 실적을 기준으로 산출하는 후행 PER과 달리 앞으로의 실적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가늠하는 데 활용된다.
코스피 선행 PER은 올해 3월 말 8.18배에서 6월 말 7.69배, 7월 말 5.54배로 낮아졌다. 이후 8월 말 5.52배, 9월 말 5.55배에 이어 이달 8일 5.11배까지 추가 하락했다. 지난 7월 이후 낮은 수준의 밸류에이션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가를 뒷받침하는 기업들의 실적은 분명 크게 개선됐다. 올해 상반기 코스피 상장사 634곳의 연결 순이익은 386조674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33.3% 급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를 제외해도 순이익이 119.7% 증가했다. 다만 두 회사가 전체 순이익의 약 65%를 차지할 정도로 반도체 업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코스피가 지난해 10월 말 4107.50에서 올해 10월 8일 6625.93으로 61.3% 상승했음에도 선행 PER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주가 상승폭이 향후 기업 이익 전망 증가폭을 쫓아가지 못한 것이다. 최근에는 증시 조정까지 겹치면서 밸류에이션이 추가로 낮아지고 있다.
이미 발표된 기업 이익을 기준으로 산출한 후행 PER도 역사적 저점 수준으로 내려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8일 코스피 후행 PER은 11.05배로 2023년 1월 6일(11.02배) 이후 약 3년9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최근 증시 약세를 부추기는 주요인으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매도세가 꼽힌다. 외국인은 이날까지 코스피에서 5거래일 연속 ‘팔자’ 행진을 이어갔다.
외국인은 지난 9월 코스피시장에서 21조5910억원을 순매도한 데 이어 이달 들어서도 12일까지 8조9553억원을 팔아치웠다. 외국인은 올해 코스피에서 약 199조원을 순매도했다. 7월 이후만 따져보면 약 100일간 외국인 누적 순매도 규모가 50조5736억원에 달했다.
외국인 이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형주에 집중되고 있다. 이재원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현재 국내 주식시장의 가장 큰 고민은 반도체 실적이 아닌 외국인 수급”이라며 삼성전자의 실적 호조와 견조한 메모리 수요에도 외국인의 매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유가 상승과 미국 국채 금리 부담,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도 외국인 매도세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특히 인공지능(AI) 관련 투자가 실제 수익 증가로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그동안 증시 상승을 주도했던 반도체 대형주에 대한 투자심리가 위축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 이익 자체는 증가하고 있지만 증가 속도가 앞으로 빠르게 둔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올해 국내 기업의 EPS 증가율을 237%로 추정했다. 반면 코스피 EPS 증가율은 내년엔 33%, 2028년에는 6.3%까지 둔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기업 이익의 증가 속도가 느려진다는 의미다. 주식시장이 향후 실적 전망을 미리 반영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높은 이익 수준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가 주가 향방에 중요해졌다는 분석이다.
황산해 LS증권 연구원도 최근 “그간 국내 증시의 하단은 높은 이익 기대치가 받쳐왔으나 기대치 자체가 부담으로 전환될 여지가 부각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실적 호조가 이어지더라도 높아진 시장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반면 낮아진 밸류에이션이 주가 반등의 여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코스피가 역사적 저평가 구간에 있다며 “밸류에이션 정상화에 따른 상향 여력이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선행 PER이 6배 수준으로 회복되면 코스피가 7700선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금리와 국제유가 안정, 실적 불확실성 완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낮아진 PER이 실제 반등의 기회가 될지, 향후 이익 증가율 둔화를 선반영한 결과인지는 불확실하다. 외국인 매도세의 진정 여부와 함께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업 이익 전망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가 향후 증시 흐름을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