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미국 디지털자산 시장의 규제 틀을 법률로 확립하려던 클래리티법(CLARITY Act)이 상원의 60표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번 부결이 미국 디지털자산 산업의 규제 환경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자체 규칙 제정을 추진하고 있어 당장의 규제 공백을 일부 메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의회가 만든 법률과 달리 규제기관의 규칙은 향후 행정부나 기관 수장이 바뀌면 다시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클래리티법을 통해 장기간 유지될 시장구조 규칙을 확보하려 했던 업계가 이번 표결 결과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2022년으로 돌아간 건 아니다”…SEC·CFTC가 공백 메울까

15일(현지시각) 코인데스크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브래드 갈링하우스 리플 최고경영자(CEO)는 클래리티법 부결에 대해 “뼈아픈 결과”라며 미국의 경쟁력과 소비자를 위한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SEC와 CFTC가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한 규칙 제정을 계속할 것이라며 리플 역시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코너 하우 엔소 공동창업자 겸 CEO도 “60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서 시장이 2022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CFTC와 SEC가 기존 권한을 활용해 디지털자산 시장구조 관련 규칙 마련에 이미 나선 만큼 클래리티법 부결이 현재 진행 중인 규제 작업까지 중단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다만 하우 CEO는 규제의 지속성을 문제로 꼽았다. 행정기관이 마련한 규칙은 의회의 표결 없이도 차기 기관장이 변경할 수 있지만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바꾸려면 다시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규제 안정성을 중시하는 은행과 자산운용사 입장에서는 법률과 행정규칙의 차이가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렉스 블룸 투프라임 창업자 겸 CEO 역시 단기적으로 의회를 통한 포괄적인 디지털자산 법제화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당분간 SEC와 CFTC의 규칙 제정이 규제 공백을 채울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향후 행정부 변화에 따라 정책이 다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클래리티법이 좌초한 배경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책임 공방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측은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의 디지털자산 사업을 둘러싼 이해충돌 방지 방안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공화당 지도부가 협상을 중단하고 표결을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법안을 주도한 신시아 루미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민주당이 막판까지 새로운 요구를 추가했다고 반박했다. 윤리 규정뿐 아니라 은행 예금과 경쟁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보상 문제도 양측의 주요 쟁점으로 작용했다.

“유럽은 이미 MiCA”…美 규제 경쟁력 약화 우려

입법 지연이 장기화될 경우 미국이 글로벌 디지털자산 규제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레데릭 그레가드 카르다노재단 CEO는 유럽에서는 디지털자산 규제법인 미카(MiCA)를 통해 사업자가 따라야 할 규칙을 이미 파악할 수 있다며 미국의 규제 불확실성을 지적했다. 조슈아 리즈먼 GSR 최고법률·전략책임자도 미국 의회가 포괄적인 시장구조법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다른 국가들이 더 빠르게 움직여 글로벌 디지털자산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할 여지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아비셰크 바이디아나탄 니어 최고법률책임자(CLO)는 클래리티법 부결로 기업들이 규제기관의 지침과 행정적 판단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2027년 사업계획을 마련하는 기업들은 법적 불확실성을 비용에 반영해야 하고 규제 명확성을 기다리던 자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워싱턴 시간만 늦어졌을 뿐”…크립토 사업은 계속

반대로 클래리티법 부결이 디지털자산 산업의 구조적인 성장 흐름을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앨런 코네브스키 티제로 CEO는 규제된 디지털자산 시장으로의 구조적 전환은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이번 표결 결과가 그 흐름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평가했다. 기관들은 규제 경로와 별개로 기존 금융 인프라를 디지털자산 기반 기술로 전환하는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바실리스 치오카스 매터랩스 성장 담당 부사장도 이번 표결이 바꾼 것은 “워싱턴의 시간표이지 은행의 방향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은행들이 이미 토큰화 예금과 결제·담보·증권 관련 인프라 구축에 나서고 있어 입법 지연이 사업 자체의 중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스트래티지는 비트코인의 경우 CFTC의 상품 취급과 미 국세청(IRS)의 재산 분류, SEC의 현물 비트코인 상품 승인 등을 통해 이미 상당한 규제적 지위를 확보했다는 입장을 내놨다. 클래리티법 부결의 영향을 비트코인 자체와 나머지 디지털자산 시장구조 전반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클래리티법 부결로 미국 디지털자산 규제의 무게중심은 당분간 의회에서 SEC와 CFTC 등 규제기관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에서는 규제기관이 입법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지와 함께 법적 불확실성이 기관 자금 유입과 기업의 미국 내 투자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