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관세 협상을 지렛대로 삼아 주요 교역국에서 끌어낸 대미투자는 파트너국들이 미국 제조업 재건 비용을 대는 ‘역(逆)마셜플랜’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투자국들은 자금 부담에 더해 통화가치 하락과 실질소득 감소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마커스 놀런드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부소장은 27일 한국경제인협회와 PIIE가 서울 FKI타워에서 공동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에서 9개 경제권의 약 6조달러 규모 대미투자 약속을 이같이 평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서유럽 재건을 지원했던 마셜플랜과 반대로 이번에는 교역 상대국이 미국 제조업 재건 비용을 댄다는 의미다.
놀런드 부소장은 “거액을 해외로 보내는 나라는 투자액에 더해 통화가치 하락으로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추가 부담까지 진다”고 말했다. 그는 대미투자로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의 성장률은 소폭 낮아지고 미국의 성장은 다소 빨라질 것으로 분석했다. 다만 달러 강세로 미국 무역적자는 오히려 늘어날 것으로 봤다. 한국은 투자 기간이 10년으로 일본(4년)보다 길어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을 것으로 내다봤다.
고율 관세에도 미·중 공급망이 여전히 연결돼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메리 러블리 PIIE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관세 장벽은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국 직접 수입 비중은 줄었지만 멕시코·베트남 등 ‘연결국’을 거쳐 들어오는 중국산 부가가치는 늘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무역 제한 속에서도 인공지능(AI) 관련 품목 교역이 확대되고 있다”며 “한국이 교역 다변화에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좌담에 참석한 이창용 PIIE 객원연구위원(전 한국은행 총재)은 대미투자를 “경제 문제뿐 아니라 정치 문제”라고 규정했다. 그는 “미국 민주당이 집권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며 “이 정도 약정은 계속될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한 가정”이라고 했다.
이 위원은 한국 경제의 위험 요인으로 반도체 사이클 조정을 꼽았다. 그는 “반도체에 너무 치중돼 있다 보니 조정에 들어갈 수 있는 점이 리스크”라며 “AI 산업 수익성이 훼손되면 자본시장 조정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미·중 갈등이 한국에 기회로 작용하는 측면도 짚었다. 미국의 대중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이 한중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한국은 글로벌 무역 시스템에서 많은 혜택을 봤다”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아자이 방가 세계은행 총재는 영상을 통한 기조연설에서 청년 인구 증가에 비해 새 일자리가 크게 부족하다며 대응을 촉구했다. AI에 대해서는 “AI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아직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노동 생산성과 근로 환경 개선에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흥국에는 거대 모델 개발보다 농업·교육·보건 등 실생활에 응용하는 ‘스몰 AI’에 집중하라고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