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삼킨 뒤 처음 느껴졌던 쓴맛이나 떫은맛이 사라지고 입안에 은은한 단맛이 다시 올라오는 ‘회감(回甘)’, 같은 찻잎을 여러번 우려내도 향과 맛이 쉽게 약해지지 않는 힘, 즉 ‘내포성’이 중요합니다.”
누가 ‘벼’를 벼나무라고 불렀다고 해 깔깔 웃었는데, 정작 차는 나무에서 찻잎을 채집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인근에 자리 잡은 다정심원(茶井心源)에는 아름드리 차나무 사진이 걸려 있다. 중국 윈난성 원시림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고차수(古茶樹), 말 그대로 오래된 야생 차나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낮은 차밭의 차나무와 달리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나무도 많다.
다정심원은 고재윤 전 경희대 고황명예교수가 정년퇴직 후 문을 연 차·워터·와인 복합 문화공간이다. 차와 물을 통해 마음의 근원을 돌아보고 삶의 행복을 만나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고 교수는 평생 ‘마시는 것’을 연구했다. 젊은 시절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20년간 식음료 현장을 지켰고, 이후 경희대 호텔관광대학에서 25년간 와인과 차, 물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세계 40여 개국의 와인 산지와 생수 수원지를 답사했다.
현재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KISA) 회장 을 맡고 있으며,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포르투갈에서 와인 기사 작위를 받았다. 독일 베를린 와인 트로피 심사위원, 아시아 와인 트로피에서는 아시아인 최초로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한국서비스경영학회장을 비롯한 여러 관련 학회장을 역임했다. 평생 와인을 연구한 그가 대학을 떠난 뒤 택한 것은 보이차였다. 왜 차였을까.
“와인을 연구할수록 빈티지와 숙성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습니다. 그러던 중 잦은 시음과 과음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자연 치유에 대한 신념으로 보이차를 만났고, 자연스럽게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보이차는 그에게 또 하나의 숙성 문화 세계를 열어줬다. 윈난성 해발 1800m 이상의 자연 생태 차산만 25차례 넘게 찾아 보이차 연구에 심취했고,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은퇴를 앞두고 평생 연구한 식음료 문화를 가장 깊이 완성할 분야가 보이차라고 판단했다.
“저에게 은퇴는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연구를 시작하는 쉼표였습니다.”
그는 와인과 보이차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둘 다 시간과 땅, 인간의 장인정신이 만나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깊어지는 음료라는 것이다.
“둘 다 시간을 마시는 음료입니다. 좋은 와인은 시간이 품질을 완성하고, 좋은 보이차 역시 시간이 향과 맛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시간은 최고의 양조자이자 최고의 제다사입니다.”
젊은 와인의 거친 타닌과 보이 생차의 강한 떫은맛은 세월 속에서 부드러워지고 복합적인 풍미로 변한다. 와인 셀러에서 올드 빈티지가 익어가는 과정과 보이차가 저장 환경에서 숙성되는 과정은 닮았다. 희소성이 커지며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와인의 기본은 테루아(terroir)다. 포도가 자란 토양과 기후, 고도와 주변 환경이 와인의 맛을 좌우한다는 개념이다.
“물론입니다. 보이차 역시 차나무가 어디에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품질과 개성을 결정합니다. 윈난의 이무(易武), 맹해(勐海), 임창(臨滄)처럼 산지가 달라지면 해발 고도, 기후, 토양이 달라서 향미도 달라집니다. ‘이무 차는 부드럽고 우아한 여왕 같고, 맹해 노반장 차는 묵직하고 강렬한 패왕 같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고 교수가 와인 소믈리에로 단련한 감각은 차를 이해하는데도 쓰였다. 양조학, 후각 훈련, 아로마 휠을 활용한 향미 분석 경험이 보이차의 제다와 테이스팅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됐다. 소믈리에가 산도와 타닌으로 와인의 상태를 살피 듯, 차 전문가는 잔향과 여운, 질감의 깊이를 통해 숙성과 보관 상태를 짐작한다.
“둘 다 오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감각은 혀가 아니라 경험의 기억입니다. 수많은 경험이 축적될수록 한잔의 차와 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정심원의 벽에 걸린 여러 산지별 차왕수 사진으로 이야기가 돌아갔다. 험한 산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걸어서 올라 산 정상에서 만난 오래된 차나무는 일반 나무와 품격이 달랐다고 했다. 보이차를 연구하며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도 나무 앞이었다.
“윈난성 애뢰산(哀牢山)의 야생 고차수로, 추정 수령 2700년의 ‘중국 차수왕(中國 茶樹王)’이라 불립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견뎌온 나무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 차를 연구한다기보다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윈난의 고수림은 흔히 보는 계단식 차밭과 품격이 달랐다. 안개를 헤치고 오른 산에서 본 거대한 차나무들은 야생화와 이끼, 다른 아름드리나무와 뒤엉켜 원시림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위대한 차는 인간의 기술만이 아니라 자연의 생물다양성이 함께 빚어낸다는 것이 20년 답사의 결론이다.
“인간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지만, 자연에게 시간은 쌓여가는 것입니다. 고차수는 자신의 나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더 깊은 향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도 시간이 쌓일수록 더 따뜻하고 깊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보이차를 고르는 기준은 와인에서 생산자와 빈티지, 테루아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로부터 인정받은 차 산지와 보관 상태가 검증된 보이차를 고르는 것입니다. 오래됐다고 모두 좋은 보이차는 아닙니다. 좋은 원료와 적절한 보관이 전제돼야 숙성을 통한 가치가 생깁니다.
초보자라면 대익(大益·TAETEA), 중차(中茶), 하관차창(下關茶廠)처럼 생산 이력과 유통 신뢰도가 비교적 분명한 대형 브랜드부터 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소비자는 ‘몇 년 숙성’이라는 문구보다 차 산지와 원료, 생산자, 보관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지나치게 저렴하거나 희소성을 과장한 제품도 경계해야 한다.
“좋은 보이차는 광고가 아니라 잔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합니다. 화려한 향보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깨끗한 향과 깊은 단맛, 긴 여운이 있어야 합니다. 차를 삼킨 뒤 쓴맛이나 떫은맛이 사라지고 은은한 단맛이 되돌아오는 ‘회감(回甘)’, 여러 번 우려도 향과 맛이 쉽게 약해지지 않는 ‘내포성’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