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정화 기자] 엔비디아가 투자한 호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기업 퍼머스 그리드(Firmus Grid)가 기업공개(IPO)에 실패했다. 기업가치 300억달러를 내세웠지만 미국 기관투자자들의 외면으로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AI 인프라 투자 열풍 속에서 기업가치 고평가와 수익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경계심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퍼머스 그리드는 9일(현지시각) 미국 기관투자자들의 수요 부족으로 IPO를 철회하고 기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민간 자금 조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퍼머스는 최대 55억달러를 조달하는 호주 증시 사상 최대 규모 중 하나의 IPO를 추진했다. 목표 기업가치는 30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 기관투자자들은 기업가치가 지나치게 높다고 판단했다. 주관사들은 공모 규모를 약 30억달러로 줄이고 기업가치도 200억~250억달러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간, 모간스탠리, 모간스파이낸셜 등이 공동 대표주관사를 맡았다. 상장 무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8시간이었다.
AI 데이터센터 고평가 논란… 매출 5100만달러에 몸값 300억달러
투자자들이 가장 우려한 부분은 실제 사업 성과와 기업가치의 격차였다. 퍼머스는 총 912메가와트(MW) 규모의 데이터센터 개발 계획을 제시했지만 실제 구축한 용량은 46MW에 그쳤다. 2026회계연도 매출은 51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300억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요구했다. 투자자들은 향후 데이터센터 건설과 매출 확대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에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업가치 상승 속도가 너무 가팔랐다. 퍼머스는 지난 4월 엔비디아와 코튜매니지먼트의 투자를 유치할 당시 55억달러로 평가받았다. 이후 8월께 기업가치가 105억달러를 넘어섰고, 10월 IPO에서는 300억달러를 요구했다.
레오니드 미로노프 가브칼캐피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공모 구조와 가격, 기업가치 평가 지표를 비판했다. 그는 1년 전 20억달러 미만이던 기업가치가 8월 100억달러, 10월에는 그 세 배 수준으로 뛰었다고 지적했다.
호주 대형 연기금 유니슈퍼도 사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며 지난 7월부터 IPO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AI 투자 위험 경고… 도이체방크 “IPO 실패가 시스템 위험”
이번 상장 무산은 AI 투자에 대한 금융시장의 경계심이 커지는 가운데 발생했다. 조지 사라벨로스 도이체방크 외환리서치 책임자는 최근 투자자들과의 대화를 토대로 AI 생태계의 문제가 내년 금융시장의 최대 시스템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내년 시장의 가장 큰 시스템 위험은 프랑스가 아니라 AI 생태계에서 무언가 잘못되는 상황”이라며 AI 안전사고, IPO 실패, 기대에 못 미치는 매출 등을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사라벨로스는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도 인용했다. 해당 연구는 AI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투자에서 수익을 확보하려면 2032년까지 연간 3조500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그는 AI 관련 자산에 대한 투자 집중도가 매우 높다며 시장이 관련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산업에 충격이 발생하면 달러 약세와 채권 강세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퍼머스의 IPO 실패가 AI 산업 전반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래 성장 전망에 의존한 높은 기업가치가 실제 자금 조달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