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주식부터 회사채, 사모펀드, 인프라까지 인공지능(AI) 투자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글로벌 연기금과 국부펀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자산에 투자해 위험을 나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상당수 자산이 AI라는 하나의 위험 요인에 묶여 있어서다. AI 투자 열풍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관련 기업의 고평가 논란이나 설비투자 둔화가 현실화하면 여러 자산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0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3270억달러를 운용하는 뉴욕시 퇴직연금(NYCRS)은 최근 AI 관련 기업 비중이 높은 한 사모펀드 투자를 거절했다. 몬테 타복 NYCRS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해당 상품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존 포트폴리오에 이미 AI 관련 위험이 광범위하게 포함돼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언제 충분한 수준이고 언제 지나친 수준인지 알 수 없다”며 AI 투자 비중을 추가로 늘리는 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주식 40%·회사채 절반이 AI…자산 나눠도 위험은 하나
기관투자자가 긴장하는 이유는 AI가 더 이상 기술주만의 투자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반도체와 대형 클라우드 사업자 등 AI 인프라 관련 기업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시가총액의 약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신흥시장 주가지수에서는 반도체 기업 세 곳의 비중만 25%를 넘는다.
채권과 벤처투자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투자등급 회사채 발행의 절반 가까이가 AI와 관련됐고 벤처캐피털 투자금의 87%가 AI 분야에 몰렸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급증하면서 인프라 투자 역시 AI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자산군을 주식과 채권, 사모투자, 인프라로 나눠도 실제 위험 요인은 AI에 집중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 간 연결도 복잡해지고 있다. AI 기업이 다른 AI 기업에 투자하거나 제품을 구매하는 이른바 ‘순환 금융’이 늘고 있어서다. 한 기업의 실적이나 투자가 꺾이면 공급업체와 고객사, 투자기업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JP모건체이스가 연기금과 대학기금의 자산 배분을 가정해 구성한 4개 포트폴리오를 분석한 결과 최근 몇 년간 모두 AI 관련 위험 요인과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자산을 여러 곳에 나눠 투자해도 AI 시장이 흔들릴 경우 포트폴리오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인베스코가 국부펀드 90곳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절반 이상이 AI 투자의 최대 위험으로 ‘시장 집중’을 꼽았다.
“철도·인터넷도 그랬다”…문제는 투자 사이클 끝나는 시점
기관투자자들이 AI 투자를 줄이는 데도 부담은 있다. 최근 2년간 AI 관련 주식의 수익률이 시장 평균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글로벌 AI 관련 주식 지수는 이 기간 시장 전체보다 연평균 11%포인트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AI 비중을 지나치게 낮추면 오히려 시장 수익률에서 뒤처질 위험이 있는 셈이다.
리사 샬렛 모건스탠리 웰스매니지먼트 CIO는 AI가 주식뿐 아니라 신용시장 성과에도 깊숙이 연결돼 있어 기존 분산투자의 어려움을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과거 철도와 인터넷 투자에서도 나타났듯 어느 시점에는 필요한 인프라가 충분해질 것이라며 문제는 그 시점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연기금들은 AI 위험을 별도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940억달러 규모의 로스앤젤레스카운티 직원퇴직연금(LACERA)은 전체 투자자산의 AI 노출도를 분석한 결과 8~19%가 AI와 관련된 것으로 추산했다.
자산군별 투자 한도를 정하는 기존 방식 대신 포트폴리오 전체의 위험 요인을 한꺼번에 살피는 ‘총포트폴리오 접근법(TPA)’도 주목받고 있다. 주식과 채권을 얼마나 보유했는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자산이 실제로 어떤 공통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를 파악하자는 것이다.
다만 타복 CIO는 AI의 변화 속도가 빨라 기존 분석도 금세 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투자하는 거의 모든 펀드는 결국 AI 노출을 더 가져올 수밖에 없다”며”기관투자자의 과제는 AI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보다 포트폴리오 곳곳에 숨어 있는 AI 위험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관리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