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함지현 기자]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이 이더리움의 ‘양자 안전성(quantum safety)’을 핵심 기술 과제로 전면에 내세웠다. 양자컴퓨터가 기존 공개키 암호 체계를 무력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양자내성 서명과 확장 가능하고 투명한 영지식 증명(STARK)을 프로토콜 전반에 적용한다는 구상이다.

11일 비탈릭 부테린은 X(옛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2023년 작성했던 이더리움 로드맵과 현재 이더리움 재단의 ‘스트로맵(Strawmap, 커뮤니티 논의를 통해 변경될 수 있는 가안)’을 비교하며 “일부 항목의 순서가 재조정됐다”며 양자 안전성을 우선순위가 높아진 대표적인 분야로 꼽았다.

그는 “이더리움은 양자 안전성을 갖추게 될 것”이라며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최우선으로 두고, 안전성과 검열 저항성을 확보하면서 높은 성능과 확장성을 달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변화는 이더리움 재단이 올해 공개한 차세대 기술 청사진과 궤를 같이 한다.

이더리움 재단은 지난 2월 초당 1만건 수준의 트랜잭션 처리를 목표로 하는 ‘기가가스(Gigagas) L1’을 비롯해 △패스트 L1 △기가가스 L1 △테라가스 L2 △양자내성 L1 △프라이빗 L1 등 5가지 최종 목표를 담은 스트로맵을 공개했다.

부테린이 이번에 공개한 설명에서도 우선순위 변화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났다. 2023년 로드맵과 비교해 양자 안전성의 우선순위가 올라갔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던 기술들이 현재 스트로맵에 대거 포함됐다.

최신 로드맵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양자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성능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내성 환경에서도 높은 확장성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이더리움 활동을 일률적으로 최대한 확장하는 대신 토큰 전송과 스왑, 향후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처럼 처리량이 많이 필요한 영역에 특화된 메커니즘을 도입하고, 확장 가능하고 투명한 영지식 증명(Stark, 스타크)과 인공지능(AI) 기반 형식 검증을 프로토콜의 핵심 기반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부테린은 향후 이더리움이 지향하는 방향을 “양자 안전성, 프라이버시, 보안, 검열 저항성, 높은 성능과 확장성”으로 요약했다.

앞서 부테린은 지난 6월 양자컴퓨터의 위협에 대비하면서도 확장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더리움 개선 제안(EIP)-8288을 제시했다. 해당 제안에 따르면, 수많은 서명과 거래 증명을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여러 개를 하나의 스타크(STARK) 증명으로 묶어(aggregation) 한꺼번에 검증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양자 보안을 강화하면서도, 프라이버시 기술이나 레이어2(L2) 솔루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더리움의 거래 처리 비용과 네트워크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고자 한다.

I updated my 2023 roadmap diagram to overlay where the items that were there sit in the current Strawmap ( https://t.co/9deLIQWG24 ).

* Some things got reshuffled in order (eg. quantum safety up-prioritized)


* Some things deprioritized (eg.… pic.twitter.com/XLdIt4kAgT

— vitalik.eth (@VitalikButerin) August 10, 2026

양자컴퓨터가 왜 위험한가…공개키에서 개인키 역산 가능성

이더리움이 양자 보안을 서두르는 배경에는 기존 블록체인이 사용하는 공개키 암호 방식이 미래의 고성능 양자컴퓨터에 취약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당장 이더리움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더리움 공식 홈페이지도 “현재 이더리움 암호 체계를 깨뜨릴 수 있는 양자컴퓨터는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쇼어(Shor) 알고리즘을 실행할 수 있는 암호학적으로 유의미한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면 블록체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타원곡선 암호(Elliptic Curve Cryptography)가 위협받을 수 있다. 타원곡선 암호는 수학적 난제(이산대수 문제)를 기반으로, 공개키(계좌번호)를 보고 개인키(비밀번호)를 역추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적 특성을 이용해 이산대수 문제 등을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풀어내는 방법론인 쇼어 알고리즘을 가동하게 되면 타원곡선 암호의 전제 조건 ‘역추적 불가’가 깨진다.

즉, 누군가의 지갑 주소(공개키)만 알아도 쇼어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면 타원곡선 암호로 보호받던 모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지갑의 자금을 누구나 해킹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외신 코인텔레그래프는 크리스토퍼 스미스 퀀터스 네트워크 최고경영자(CEO) 겸 공동창업자를 인용해 “양자컴퓨터가 충분한 성능에 도달하면 공개된 온체인 공개키만으로 개인키를 계산해 자금을 탈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격자가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온체인에 노출된 공개키에서 개인키를 계산한다면 스마트폰이나 거래소 서버에 직접 침투할 필요가 없고 외부에서는 정상적인 거래로 보일 수 있어서 공격 경로를 추적하기도 어렵다. 이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나 거래소처럼 막대한 자산을 통제하는 관리 키가 먼저 표적이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부테린, ‘양자 비상사태’ 발생시 하드포크 방안도 제안

비탈릭 부테린을 포함한 이더리움 연구진들은 네트워크에 양자내성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뿐 아니라 예상보다 일찍 양자 공격이 현실화되는 ‘비상 시나리오’도 검토해왔다.

부테린은 지난 2024년 ‘양자 비상사태에서 대부분 이용자의 자금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하드포크할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양자컴퓨터가 갑작스럽게 기존 암호를 깨뜨리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복구용 하드포크 방안을 제시했다.

양자 공격에 따른 대규모 탈취가 확인될 경우 공격 발생 전 시점으로 네트워크를 되돌리고, 기존 방식의 거래를 비활성화한 뒤 새로운 검증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용자는 스타크 증명을 통해 자신이 기존 계정의 비밀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계정을 새로운 검증 코드로 전환한다. 공격자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존 서명 체계 대신 양자내성을 갖춘 새로운 인증 방식으로 이동시키는 일종의 비상 탈출구다.

부테린은 당시 이더리움이 이런 상황에 대비해 비교적 단순한 ‘복구 포크(recovery fork)’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양자 공격이 발생하면 반드시 하드포크를 실시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 공격 발생 여부와 범위, 커뮤니티 합의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비상 대응 구상에 가깝다. 현재 이더리움의 기본 전략은 사전에 양자내성 암호 체계로 전환해 비상 상황 자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더리움 공식 로드맵에 따르면 재단은 전담 양자내성 연구팀의 연구와 멀티클라이언트 개발망 테스트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구조화된 포크를 통한 양자내성 전환은 2029년 전후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계정이 다양한 서명 방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명 민첩성(signature agility)’ 역시 양자내성 서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기반으로 꼽힌다.

2026년 로드맵, 우선순위 재편…프라이버시 격상, VDF·EVM 개선 등은 후순위

한편, 2026년 로드맵은 2023년 로드맵과 달리 프라이버시를 주요 사항(first-class)으로 취급하는 대신 VDF와 이더리움 가상머신(EVM) 개선 등의 우선순위는 내렸다.

새로운 로드맵에는 거래 과정에서 이용자의 활동을 추적하기 어렵게 만드는 기술과 프라이버시 풀, 자산 이동 경로를 보호하는 기술 등이 포함됐다. 기존에는 프라이버시가 개별 애플리케이션이나 부가 기능을 통해 구현하는 영역에 가까웠다면, 앞으로는 이더리움 프로토콜 설계 단계부터 중요하게 고려하는 핵심 목표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다.

반대로 검증가능 지연함수(VDF)와 여러 이더리움 가상머신(EVM) 개선 작업은 우선순위가 낮아졌다. VDF는 일정한 계산 시간이 지나야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한 암호 기술로, 과거 이더리움의 무작위성 생성과 네트워크 보안 등을 강화할 기술로 연구돼 왔다. EVM 역시 이더리움에서 스마트계약을 실행하는 핵심 환경인 만큼 다양한 성능 개선안이 논의됐지만, 최신 로드맵에서는 일부 개선 작업의 중요도가 낮아졌다.

이는 해당 기술을 포기한다는 의미라기보다 한정된 개발 역량을 양자 보안과 프라이버시, 확장성 등 보다 시급한 과제에 집중하겠다는 우선순위 재편으로 풀이된다. 특히 부테린이 장기적으로 EVM보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새로운 명령어 체계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존 EVM을 계속 복잡하게 개선하기보다 이더리움의 실행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가능성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