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장 모델을 AI에 얼마나 맞추느냐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될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AI에 대체되지 않을 전문가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서울대를 방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대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강조했다. 인공지능(AI)으로 세상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하나의 경력이나 직업으로는 경쟁력을 잃기 쉽기 때문에, 여러 분야를 넘나든 경험으로 스스로 길을 설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5일 서울대를 방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날 오후 4시부터 두시간 가량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건물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최 회장은 연단에 서서 ‘인공지능(AI) 시대의 시장경제와 인재’를 주제로 강연한 뒤 학생들과 질의응답을 주고 받았다.
최 회장은 강연을 시작하며 과거와 다르게 흘러가는 지금의 세계 경제 상황을 짚었다. 그는 “해방 이후 수십 년간 가져온 우리의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미국과 중국의 공급망이 분리되기 시작했고, 모든 나라에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묻고 있다”고 현상을 짚었다.
이에 “두 나라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어 어느 한쪽 시장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라며 “전 세계가 이미 AI에 베팅하고 있어 우리도 여기에 베팅하지 않고는 쫓아갈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도 AI 인프라 경쟁에 과감히 투자하지 않고서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른바 ‘AI 피크아웃’ 우려에 대해선 ‘질 수 없는 싸움’이라며 지속적인 투자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은 ‘AI가 아직 페이오프(성과 증명)가 잘 안 된다’ ‘인풋과 아웃푼의 선순환이 아직 증명이 안 됐다’고 하는데, 증명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며 “미국의 빅테크 기업처럼 이 싸움에서 질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앞으로도 돈이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서 최 회장은 한국 경제의 4가지 해법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AI 네이티브 국가 △한일 협력을 통한 선택의 확장 △인센티브 시스템 등을 제시했다.
최 회장은 “자본주의는 기업과 민간이 돈을 벌면 세금을 내고 정부가 그것으로 사회문제를 푼다는 삼각구조인데,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비용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가치를 창출하는 이에게 혜택을 주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저성장 탈출을 위해 대기업 규제 중심의 인센티브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최 회장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규제가 생기며 받던 지원이 모두 끊기기 때문”이라며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은 지원하는 구조가 고착된 뒤부터는 오히려 기존 대기업에만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성장한 만큼 지원해주고 대기업이 돼도 계속 지원하는 쪽으로 프레임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성장하려 하지 않는다”며 “성장이 멈추면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연을 마치고 이뤄진 질의응답에서 최 회장은 학생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 학생이 “리더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최 회장은 “리더십이 필요한 건 잘나갈 때가 아니라 어려워졌을 때”라며 “리더는 풍전등화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화를 거꾸로 바꿀지 고민해야 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무엇이든 책임지고 나서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리더십의 모범(example)”이라고 말했다.
또 한 학생이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에 대한 생각을 묻자 최 회장은 “중간선거가 어떻게 됐든 ‘우리와 무슨 관계냐’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며 “중간선거 하나에도 정책이 바뀐 게 없는데, 바뀐다는 생각으로 시장이 와장창 반응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돈은 너무 많이 풀렸다. 이런 롤러코스터 장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행사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가량 늦게 끝나기도 했다. 최 회장은 강연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30대, 40대에 무엇을 했느냐로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며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해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마음속에 있는지가 행복을 결정한다. 스스로 인생 설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경제학부 주최로 이뤄진 이번 강연은 경제학 이론을 현실 경제 흐름과 연결해 이해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강연이 열린 사회과학대학 건물 1층에는 강연 한시간 전부터 관심을 가진 학생들로 붐볐다.
강연이 시작하면서는 200석이 넘는 관람석이 꽉 찼다. 3개 층이 가운데로 트인 구조의 건물 위층 난간에도 학생·교직원들이 서서 강연을 지켜보는 등 400명이 넘는 이들이 강연을 지켜봤다. 최 회장이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과 만난 건 지난 2022년 ‘시장의 변화, 미래의 기업’을 주제로 특강한 지 약 4년 반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