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중국에 월등히 앞서는 제조업은 이제 D램 반도체뿐이다. D램에서 초격차를 유지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최근 중국의 D램 제조회사 CXMT가 전 세계 시장점유율 10%로 두 자릿수를 기록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에 우려의 목소리가 퍼지고 있다. 중국이 점차 기술 격차를 좁혀오는 상황에서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액정디스플레이(LCD)나 2차전지처럼 중국에 시장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연구개발직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 예외, 기술 유출 처벌 강화, 혁신 연구개발(R&D) 강화가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기업 R&D에서 주 52시간 근무 제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주 52시간 근무 제한을 풀어주면 초과 근무가 과도하게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장의 설명이다. 오히려 기업들이 이를 없애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경직적인 근무 시간이 연구자들의 몰입을 방해하고 기업 내에 일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분야 연구자는 “연구를 하다 보면 조금만 하면 더 될 것 같다는 ‘감’이 오는 때가 있다. 그때가 중요한 순간이고 더 일을 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면서 그런 상황에서 중단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한 엔지니어는 “반도체 산업은 엔지니어 한 명이 자신이 맡은 분야에 얼마나 집중하고 몰입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오직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만 반도체 산업이 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면서 정해진 퇴근 시간에는 회사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참 연구에 몰입된 상태에서 이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밀 유출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재택근무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 반도체 기업 인재들이 한국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는데 한국은 인재들이 일하는 시간에 제한을 두면서 R&D 경쟁력 저하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온다. 중국 테크업계 전문가인 백서인 한양대 교수는 “중국 테크기업들은 한국에 비해 높은 월급을 준다”면서 “하지만 그만큼 높은 업무 강도가 뒤따른다”고 설명했다.
한 전자업계 임원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기준으로도 높은 수준의 성과급을 받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직원들이 주 52시간만 일한다는 것은 보상의 형평성 측면에서도 옳지 않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생존이 절박한 반도체 스타트업들은 베트남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 채용을 늘리고 있다. 한 반도체 스타트업 임원은 “베트남 직원을 고용하면 주 52시간 제한을 받지 않고 일하려는 의욕도 한국 직원들보다 높다”며 주 52시간제가 청년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경기 대구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차기 반도체공학회장)는 “주 52시간제를 없애달라는 것은 과거처럼 장시간 근무를 하라는 게 아니라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라는 것”이라며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처럼 집중적으로 일하고 한 달간 휴가를 가는 식으로 근무시간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기술 유출에 따른 이득보다 적발 시 피해를 월등히 높여야 한다는 설명도 나온다.
최근 기술 유출에 대한 국가적인 경각심이 커지면서 뒤늦게 이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있다. 지난해 7월 시행된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 핵심 기술 해외 유출 범죄의 벌금 상한을 15억원에서 65억원으로 높이고 처벌 대상과 구성 요건을 확대했다. 간첩죄 적용 대상을 외국 등으로 넓힌 개정 형법이 시행되면 산업기술 유출 행위에도 간첩죄 적용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기술 유출은 여전히 다른 국가에 비해 형사처벌 강도가 낮다고 설명하고 있다. 최근 대만 법원은 TSMC의 2㎚ 공정 기술을 일본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으로 유출한 전 직원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미래 기술에 대한 선제적인 R&D도 중요하다. 현재 중국이 한국 D램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 업체들이 EUV가 없어도 만들 수 있는 3차원 D램 기술을 선제적으로 개발해 한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이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던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로 중국 YMTC가 한국 기업들을 따라잡은 것과 유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 상용화가 먼 기술이어도 선제적으로 투자하고 대학·스타트업 등과 개방적인 혁신을 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권지민 카이스트(KAIST) 교수는 “향후 반도체는 3차원 집적과 하이브리드 본딩 같은 기술이 중요해진다”며 “특히 중국은 대학과 연계된 연구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기술 보호를 위해 대학과 교류가 많지 않은데 초기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카이스트가 참여했던 것처럼 대학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