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해킹조직 '트레이더트레이터' 배후설…FBI·비밀경호국 수사 착수
테더·서클 등 30억달러 동결…바이낸스 "손실 전액 보전"
北, 사이버 활동 겨냥한 추가 제재에 "우리에겐 안 통해" 반발
[블록미디어 이혜연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디지털자산(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의 대규모 해킹 사건이 북한 소행인지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며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 북한 배후설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지만, 북한 연계 가능성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답변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취재진과 문답하던 중 이번 해킹을 북한 해커 그룹의 소행으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피해 자금 회수 전망을 묻는 질문에는 바이낸스 측이 상황을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며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표에 서명하던 예전 방식과 달리 디지털자산은 돈이 오가는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자신은 디지털자산이 조금 위험하다고 늘 생각해왔다고 덧붙였다.
20분 만에 63억달러 유출…분석업체들 “北 소행”
이번 사건은 디지털자산 업계에서 단일 해킹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바이낸스 지갑에서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9일 오후로, 무단 인출된 디지털자산은 약 63억달러(약 8조4000억원)에 이른다. 기존 최대 기록이었던 지난해 2월 바이비트 해킹(15억달러)의 4배를 웃도는 규모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랩스에 따르면 공격자는 엑스알피 레저(XRP Ledger)와 이더리움, 비트코인, 트론, 솔라나 등 10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걸쳐 약 63억6000만달러를 바이낸스 지갑 밖으로 옮겼고, 이 가운데 대부분이 약 20분 사이에 이뤄졌다. 바이낸스의 초기 조사에서는 데브옵스(DevOps) 엔지니어의 노트북이 공격자의 최초 침투 경로로 지목됐다.
TRM랩스와 체이널리시스는 북한의 정예 해킹조직 ‘트레이더트레이터(TraderTraitor)’를 이번 공격의 배후로 지목했다. TRM랩스는 이번 해킹의 여러 특징이 앞선 북한 연계 사건, 특히 바이비트 해킹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당시 바이비트 해킹을 북한과 트레이더트레이터의 소행으로 결론 내린 바 있다. 다만 FBI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는 입장만 밝혔을 뿐, 아직 특정 조직을 배후로 공식 지목하지는 않았다.
FBI와 비밀경호국(USSS)도 수사에 착수했다. 비밀경호국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 등 민간 파트너와 함께 도난 자금을 추적·동결·회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30억달러 동결…바이낸스 “손실 전액 보전”
바이낸스는 사고 직후 모든 입출금을 중단했다. 바이낸스에 따르면 업계 파트너들과의 공조로 현재까지 약 30억달러 규모의 자산이 동결됐다. 테더(USDT) 발행사 테더가 약 15억7000만달러, 유에스디코인(USDC) 발행사 서클이 8억달러 이상을 각각 동결했다. 다만 동결됐다고 해서 곧바로 이용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발행사가 직접 동결할 수 없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회수가 더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낸스는 이번 사고로 발생한 손실을 전액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리처드 텅 바이낸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소셜미디어 엑스(X)에 올린 영상에서 신속하게 자산을 동결해준 파트너들과 각국 수사당국에 감사를 표했다. 이어 무엇보다 기다려준 이용자들에게 감사하다며 이용자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고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쉬지 않고 대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텅 CEO는 10억달러 이상의 기존 이용자 보호 준비금에 더해 회사 재무에서 60억달러를 추가로 떼어 손실에 대비하겠다고 했다. 이허(Yi He) 바이낸스 공동창업자는 출금이 11월 1일까지 재개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北 “제재 안 통해” 반발…북미 대화도 안갯속
북한은 사이버 활동 등을 겨냥한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에 반발하고 나섰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31일 담화를 내고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MSMT)과 유럽연합(EU)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이행 촉구 성명, 일부 회원국의 독자 제재를 두고 “엄중한 주권침해행위로 낙인하며 단호히 규탄 배격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그 추종세력이 적대시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음모라는 주장이다.
앞서 MSMT 회원 11개국과 EU는 지난 28일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과 호주, EU가 북한의 해외 노동자 활용과 악의적 사이버 활동, 불법적인 북러 협력 등에 연루된 개인·기관을 추가 제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하고, 대북제재 위반과 회피에 계속 대응하겠다고 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제재와 압박은 약자에게 통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아니다”라며 미국과 서방의 제재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핵화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되돌릴 수 없는 최종 결론이 났다며, 대북제재 역시 실효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어 고립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제재의 실효성을 증명할 수단도, 전략적 실패를 인정할 판단력도 없는 미국과 서방이라고 비난했다. 한국과 일본 등 미국 외 MSMT 회원국과 EU를 향해서는 미국의 대북 제재·압박에 적극 편승하고 있다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 이번 해킹 사건이 북미 대화 재개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쏠린다. 연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며 거듭 유화 메시지를 보내던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들어 예전보다 열의가 떨어진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을 방문하는 계기에 김 위원장을 만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아직 북한 소행이라는 당국의 공식 확인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 규모가 워낙 큰 만큼 수사를 거쳐 북한 당국과의 연계가 확인되면 북미 대화 재개에 부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30일 북한이 좀처럼 호응하지 않으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대면 전망이 대체로 어둡다고 보도했다. 한 아시아 외교관은 북한이 명시적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고 WP에 전했고, 한 중국 당국자도 북미 정상의 막판 회동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으로 전해진다.
WP는 바이낸스 해킹을 사례로 들며, 북한이 사이버범죄를 통해 제재 속에서도 경제를 굴려가는 능력을 키우면서 미국의 대북 협상력이 한층 약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수사 결과에 따라 이번 사건이 디지털자산 보안 문제를 넘어 대북제재와 북미 관계의 변수로도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