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정화 기자]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인 ‘디지털파운드’ 도입에 속도를 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간 스테이블코인과 은행의 토큰화 예금이 디지털 결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만큼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화폐를 발행할 필요성을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파운드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해 달러 중심의 디지털 결제 시장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12일(현지시각) PA뉴스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사라 브리든 영란은행 부총재는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 기간 중 아틀란틱카운슬 주최 행사에서 “디지털파운드가 그렇게 빨리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브리든 부총재는 디지털파운드 도입 여부가 민간 부문에서 토큰화 기술의 이점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토큰화는 기존 화폐나 금융자산을 블록체인 등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거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CBDC보다 민간 혁신 우선…디지털파운드 필요성 재검토
영란은행은 수년간 일반 국민이 사용할 수 있는 소매용 CBDC 도입을 검토해 왔다. 그러나 최근 민간 금융기관의 결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중앙은행이 별도의 디지털화폐를 발행해야 할 필요성이 달라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상업용 스테이블코인과 은행의 토큰화 예금이 실시간 결제와 자산 이전 등 CBDC가 제공하려는 기능을 상당 부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브리든 부총재는 디지털파운드 도입 결정이 다른 수단을 통해 토큰화와 금융 혁신의 이점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CBDC 도입을 전면 중단하기보다 민간 결제 인프라의 발전 상황을 지켜보면서 필요성을 판단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만 쓸 수는 없어”…파운드화 시장 육성
영란은행은 파운드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육성에도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달러 중심으로 형성된 상황에서 영국 기업과 소비자가 디지털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달러화 자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다.
브리든 부총재는 영국 국민과 기업이 혁신적인 결제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달러 스테이블코인에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파운드화에서도 같은 수준의 금융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란은행은 향후 주요 파운드화 스테이블코인 3종이 등장하고 각각 최대 400억파운드(약 68조원) 규모의 수요가 형성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정비하고 기존 결제 시스템과의 연계를 확대할 방침이다. 금융기관뿐 아니라 가계와 기업도 파운드화 스테이블코인을 일상적인 결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결제망 현대화…24시간 실시간 결제 추진
영란은행은 별도의 소매용 CBDC 발행보다 기존 금융 인프라를 현대화하는 데도 무게를 두고 있다.
핵심은 실시간 총액결제(RTGS) 시스템의 고도화다. RTGS는 금융기관 간 자금 이체를 거래별로 실시간 처리하는 중앙은행 결제 시스템이다.
영란은행은 이를 통해 중앙은행 화폐가 금융시장의 핵심 결제 자산으로서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토큰화 금융거래와 연중무휴 24시간 결제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브리든 부총재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중앙은행 화폐의 신뢰성을 유지하면서 토큰화 기술이 제공하는 신속한 결제와 효율성 개선 효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란은행의 이번 입장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발행 자체보다 실제 금융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결제 인프라 구축을 우선하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시장에서는 영국이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중앙은행 화폐와 은행 예금 및 민간 디지털화폐가 공존하는 다중화폐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