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반도체 산업 최전선에 있는 기업들 사이에서는 ‘공급 과잉’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반도체 가즈아”를 외칠 만한 환경이 펼쳐졌지만, 지금의 수요만 믿고 너도나도 생산능력을 늘렸다가는 몇 년 뒤 공급이 수요를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1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케이프리덤자산운용이 올해 2분기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컨퍼런스콜을 분석한 결과, 반도체 기업들은 AI가 만들어낸 강력한 수요에 대체로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증설 경쟁에는 신중한 모습을 나타냈다.

베시는 과거 반도체 사이클을 보면 업사이클이 대체로 6~8분기 지속된 뒤 공급과잉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공장(팹)이 건설되고 첨단 패키징 생산능력이 늘고 있는 만큼 공급과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과거 매출총이익률이 18% 안팎에 머물렀던 OSAT(반도체 조립·테스트) 업체들이 최근 40% 수준의 높은 수익성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해 공격적인 증설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이익률은 신규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부추기고 기존 업체의 설비투자 확대를 자극한다는 취지다.

이 과정에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웃돌기 시작하면 가격과 수익성이 다시 떨어지는 전형적인 반도체 사이클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베시는 메모리 반도체 역시 이런 공급 과잉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평가했다.

일본 전자부품업체 무라타는 보다 신중한 시각을 보였다. 현재 상황을 버블로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에 일부 과열 조짐이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실제 병목은 반도체 자체보다 전력과 데이터센터 하드웨어, 건물·시설 등 물리적 인프라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런 인프라 제약으로 인해 이미 발표된 투자계획과 실제 집행되는 반도체 수요 사이에 시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대규모로 구축·운영하는 빅테크 같은 하이퍼스케일러가 제시한 설비투자 규모만을 근거로 생산능력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경우 공급 과잉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컨퍼런스콜에서는 반도체 공급을 늘리는 방법이 새 공장을 짓는 것뿐인 것도 아니라는 의견도 나왔다. 세계 최대 종합 반도체 장비업체 가운데 하나인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는 고객들이 기존 팹 내부에서 추가 생산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장비업체인 램리서치는 생산라인에서 가장 느린 공정이나 장비, 즉 ‘병목’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만으로도 기존 팹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곁들였다. 수십조원을 들여 새 공장을 짓지 않고도 생산능력을 끌어올릴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반면, 이번 사이클을 과거 반도체 호황과 같은 잣대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아나로그디바이스(ADI)는 지금과 비슷한 성장세를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시기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 전후를 꼽았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반도체가 쓰이는 시장의 폭과 깊이 자체가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과거 컴퓨터와 서버 같은 중앙 컴퓨팅 시스템에 집중됐던 ‘지능’이 이제 자동차와 공장, 로봇, 각종 산업기기 등 현실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AI가 하나의 산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산업·로봇 등 다른 산업의 반도체 수요까지 끌어당기는 일종의 ‘중력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AI 투자가 데이터센터용 첨단 반도체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반도체 수요로 확산한다면 과거보다 긴 상승 사이클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다.

국내 증권사와 기관에서도 당장 공급 과잉을 우려하기에는 이르다는 시각에 무게가 실린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서버용 D램 등 일반 메모리 수요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단기간에 생산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리기는 쉽지 않은 까닭이다.

한국은행도 올 4월 ‘글로벌 반도체 경기 확장세 지속가능성 점검’ 보고서에서 이번 반도체 사이클을 AI가 주도하는 강한 확장 국면으로 진단했다. 그러면서 AI 확산이 추세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반도체 경기의 기조적 상승 국면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지금의 높은 수익성이 공격적인 증설 경쟁으로 이어지는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기존 메모리 업체들의 투자 확대에 중국 업체들의 증설까지 맞물릴 경우 공급 증가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