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한때 금융 당국의 규제 표적이 되어 디지털자산 시장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지캐시(Zcash·ZEC)가 월가의 핵심 상품으로 돌아왔다. 가격은 최근 1년 사이 16배 넘게 뛰었다. 하지만 이번 부활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캐시를 둘러싼 독보적인 ‘월가 족보’다.

그 시작에는 세계 최대 투자은행 JP모건이 있다. 9년 전 JP모건과 지캐시 개발진의 기술 협력에서 시작된 연결고리는 월가 블록체인 핵심 인력의 이동을 거쳐 그레이스케일과 디지털커런시그룹(DCG)까지 이어졌다. 최근 지캐시 기반 상장지수상품(ETP)이 뉴욕증권거래소 아르카(NYSE Arca)에 상장되면서 기술과 사람, 그리고 자본으로 이어진 오랜 인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9년 전 JP모건이 먼저 알아본 ‘선택적 프라이버시’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지캐시는 7일 장중 1249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10월 초 70달러선과 비교하면 약 11개월 만에 16배 넘게 올랐다. 같은 기간 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의 상승률을 뛰어넘는 수치다.

급등의 배경을 따라가면 지캐시가 월가와 처음 접점을 만들었던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캐시는 2013년 제로코인(Zerocoin) 프로젝트와 제로캐시(Zerocash) 연구를 거쳐, 주코 윌콕스가 설립한 일렉트릭코인컴퍼니(ECC)에 의해 2016년 세상에 나왔다.

이듬해인 2017년, 이 기술을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이 JP모건이었다. JP모건은 ECC와 손잡고 지캐시의 핵심 기술인 영지식증명(zk-SNARKs)을 자사의 기업용 블록체인 플랫폼 ‘쿼럼(Quorum)’에 접목했다.

JP모건이 원했던 것은 코인(ZEC) 자체가 아닌 ‘비밀을 지키면서 검증하는 기술’이었다. 쉽게 말해, A은행과 B은행이 수천억 원대 거래를 할 때 “금리와 거래액은 라이벌 은행에 가려 비밀로 유지하되, 금융 당국에는 위조가 없는 진짜 거래임을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아키텍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지캐시만의 독보적인 ‘선택적 프라이버시’가 빛을 발했다. 지캐시는 모든 거래를 일률적으로 감추는 ‘검은 상자’가 아니다. 이용자가 필요에 따라 공개 거래와 비공개 거래를 선택할 수 있다. 특히 ‘뷰잉 키(Viewing Key)’라는 일종의 ‘열람용 비밀번호’를 활용하면, 평소에는 거래를 감추다가도 국세청이나 회계 감사인이 요구할 때만 특정 내역을 선택해서 보여줄 수 있다. 규제 준수(Compliance)와 프라이버시 확보가 동시에 가능한 구조다.

JP모건에서 지캐시 재단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부른 NYSE 입성

당시 JP모건에서 블록체인 전략과 쿼럼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했던 핵심 인물이 앰버 볼데트(Amber Baldet)다. 볼데트는 2018년 JP모건을 떠난 뒤 지캐시 생태계를 이끄는 ‘지캐시재단’ 이사회에 전격 합류했다. 월가 최고 금융회사의 블록체인 수장이 프라이버시 프로젝트의 지배구조 중심부로 자리를 옮겨, 월가의 규제 감각과 엔터프라이즈 요구사항을 지캐시 로드맵에 지속적으로 주입한 셈이다.

그리고 수년이 흐른 뒤 이 연결고리는 월가의 거대 자본시장으로 향했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등장한 것이다. 기존 장외시장(OTC)에서 거래되던 그레이스케일 지캐시 트러스트는 구조 개편을 거쳐 지캐시 현물 ETP인 ‘ZCSH’로 전환되었고, 마침내 뉴욕증권거래소 아카(NYSE Arca)에 공식 상장됐다.

과거 자금세탁 위험성 때문에 주요 거래소에서 퇴출당했던 프라이버시 코인이, 미국 제도권 증권시장의 정식 투자상품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순간이다. 여기에 그레이스케일의 모회사인 디지털커런시그룹(DCG) 산하 자회사가 수천억 원 규모의 ZEC 현물을 출자해 지분을 취득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수급 기대감도 극대화됐다.

개발진(ECC)에서 시작된 기술 협력이 JP모건 인재(앰버 볼데트)를 거쳐, 그레이스케일·DCG의 제도권 자본으로 이어지는 ‘10년 족보’가 완성된 것이다.

AI 시대의 역설… ‘투명한 유리창’이 된 블록체인의 대안

이처럼 오랫동안 구축된 족보 위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인공지능(AI)의 등장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 나발 라비칸트는 “비트코인이 법정화폐 인플레이션에 대한 보험이라면, 지캐시는 비트코인의 지나친 투명성에 대한 보험”이라고 정의했다. AI와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기술이 결합하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온체인 장부는 이제 모든 개인과 기업의 금융 활동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유리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금융 행위가 AI에 의해 추적당하는 시대에, 정보를 직접 노출하지 않고도 진짜 거래임을 입증하는 지캐시의 영지식증명 기술은 단순한 ‘익명 코인’을 넘어 ‘AI 시대 필수 금융 보안 인프라’로 재평가받고 있다.

다만 기술의 재평가와 단기 가격 폭등은 냉정히 구분해야 한다. 최근의 1200달러 돌파에는 파생상품 시장의 숏스퀴즈(매도 포지션 강제 청산) 등 일시적 오버슈팅 수급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향후 상승세가 지속되려면 NYSE ETP를 통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관 자금이 들어오는지, 그리고 네트워크 내 비공개 거래 실사용량이 뒤따르는지가 진짜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