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상장지수펀드(ETF) 매각 이익을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육성에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과거 경기 부양을 위해 사들인 주식형 ETF에서 발생한 이익을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재투자하겠다는 구상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6일 성장전략회의를 열고 일본은행의 ETF 매각 확대에 따른 추가 이익을 경제안보와 성장산업 투자의 재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서도 “ETF 추가 매각 이익은 바로 일본 성장의 결실”이라며 “이를 위기관리 투자와 성장 투자에 재투자해 새로운 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제의 선순환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행은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0년부터 ETF를 매입했다. 특히 아베노믹스 시절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매입 규모를 확대하면서 일본 주식시장의 주요 투자자로 떠올랐다.
이후 일본 증시가 상승하면서 ETF의 평가이익도 크게 불어났다. 올해 3월 말 기준 일본은행이 보유한 ETF는 장부가액으로 약 37조엔이지만 시장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94조엔에 달한다. 두 금액의 차이인 약 57조엔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평가이익이다.
일본은행은 2024년 ETF 신규 매입을 중단한 데 이어 올해 1월부터 보유 자산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30일에는 내년 1월부터 연간 매각 규모를 장부가 기준 3300억엔에서 8600억엔으로 약 2.6배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시장가격으로 환산한 연간 매각 규모는 약 2조4600억엔에 달할 전망이다. 다만 일본은행은 주식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장 상황에 따라 매각 속도를 조정할 방침이다.
다카이치 정부는 ETF 매각으로 일본은행의 이익이 늘어나면 정부에 납부하는 국고납부금도 증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추가 국고납부금 수입을 새로운 특별회계의 재원으로 삼고, 이를 상환 재원으로 하는 ‘가교국채’를 발행해 투자자금을 미리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성장전략회의에서는 일본 정부가 육성하기로 한 17개 전략 분야, 62개 주요 제품·기술 가운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피지컬AI, 신약 개발 등 16개 중점 항목이 제시됐다.
일본 정부는 이를 현재의 수익원, 미래의 핵심 성장동력, 경제안보 강화 분야로 분류해 2040회계연도까지 약 370조엔의 민관 투자를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회의에는 키옥시아, 이비덴, 소프트뱅크, 가와사키중공업, 주가이제약, 다케다약품공업 등 주요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기업들은 국내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위한 대규모 투자 지원과 일본 자체 AI 기반 확충, 혁신 신약의 가치를 반영한 약가제도 개선 등을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내 투자 프로젝트가 착실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실행계획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다. 건설 공급능력 확보, 성장산업 자금 공급, 전력 인프라 확충, AI 전환 등 4대 과제에 대해서도 범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서두르기로 했다.
다만 일본은행의 ETF 매각 이익을 정부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에는 과제가 남아 있다. 주가에 따라 매각 이익이 달라지는 데다, 중앙은행의 자산 매각과 정부의 재정정책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일본은행의 정책 독립성이 논란이 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