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미국인 고객의 탈세를 조직적으로 도운 사실을 인정하고 벌금으로 7억8000만달러를 냈다. 고객 정보도 미국 정부에 넘겼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에 결정적인 균열이 난 순간이었다. UBS는 미국 부유층들에게 ‘자산은닉 금융상품’을 팔기 위해서, 암호화된 노트북과 페이퍼컴퍼니까지 동원했다.

스위스가 세계 부유층의 금고 역할을 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서 UBS 사건은 시점이 중요하다. 냉전이 끝나면서 글로벌 금융질서는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로 기울었고, 2001년 9·11 테러로 돈의 흐름은 곧 국가안보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2008년 금융위기까지 겹쳤다. 역외국가들이 주권을 방패 삼아 금융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명분은 빠르게 약해졌다.

흥미롭게도 역외금융에 대한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바로 그 무렵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주류 금융권이 외면하던 암호화폐 기업을 먼저 받아들인 곳은 추크(스위스), 지브롤터, 몰타, 리히텐슈타인 같은 작은 역외국가들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은행비밀이라는 전통적 경쟁력이 사라지자 ‘디지털 금융’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