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심영재 특파원] 미국 재무부가 장기 국채 바이백 규모를 확대하면서 외환시장에서 달러 가치 희석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장기 국채 수익률 상승을 정책적으로 억제하면 시장의 조정 압력이 달러 약세로 이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재무부 발표 이후 금은 3% 넘게 올랐고 비트코인은 이틀 동안 13% 상승했다.
미 재무부, 장기 국채 바이백 최소 40억달러로 확대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21일(현지시각) 장기 국채 바이백 확대가 달러 가치에 미칠 영향을 두고 시장의 논쟁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핵심은 미국 정부가 장기 차입 비용 상승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지다.
미 재무부는 지난 19일 일부 국채 바이백의 최대 규모를 기존보다 최소 두 배 늘려 ‘최소 40억달러’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매입 대상은 6월 말 이후 매도 압력이 집중된 장기 국채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20일 CNBC에 바이백 규모가 40억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밝혔다. 최근 국채 매도 과정에서 시장이 다소 앞서 나갔다는 입장도 나타냈다.
국채 바이백 자체가 새로운 정책은 아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유동성이 낮은 구형 국채의 거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2024년 바이백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표 시점과 규모가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통상적인 분기 국채발행 계획 발표 일정 밖에서 바이백 확대가 발표됐고 20년물 국채 입찰을 바로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투자자들은 이를 장기 국채 수익률 상승 압력을 낮추려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미국 장기금리는 재정 전망 악화와 대규모 국채 발행, 지정학적 위험,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책 경로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상승해왔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30년물 국채 수익률은 이번 주 200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란 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총 공공부채가 40조달러를 넘어선 시점과도 맞물렸다.
“금리 아니면 달러가 대가 치러야”
시장의 관심은 장기 국채 수익률을 인위적으로 억제할 경우 어디에서 조정이 발생하느냐에 쏠리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일부 외환시장 투자자들은 미국 정책당국이 장기 국채의 시장 균형 수익률 상승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달러가 대신 약세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채 수익률을 억제하면 미국 국채의 투자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투자자금이 줄면서 달러 수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리다.
숀 오스본 스코샤뱅크 외환전략 수석은 로이터에 “치러야 할 대가는 있다”며 “더 높은 수익률의 형태가 되거나 미국 달러가 양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려의 초점은 중앙은행이 정부 지출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돈을 찍어내는 통화 재정화와는 다르다.
로이터에 따르면 시장이 경계하는 것은 부채 이자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바이백이나 단기물 중심의 국채 발행 등으로 장기금리를 시장 균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려는 경우다. 민간 투자자가 떠안아야 하는 장기 채권의 듀레이션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 경우 조정 압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산으로 이동할 수 있다. 장기 국채 수익률 상승이 제한되면 그 부담을 달러 가치 하락이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 3%·비트코인 13% 급등…‘통화가치 희석’ 거래
로이터에 따르면 금 가격은 재무부의 발표 이후 3% 넘게 상승했다. 비트코인도 이틀 동안 13% 올랐다.
달러 가치 희석을 우려하는 투자자들이 대체 자산으로 움직였다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
조지 사라벨로스 도이체방크 전략가는 이번 조치의 효과를 연준이 2011~2012년 시행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와 비교했다.
당시 연준은 단기 국채를 팔고 장기 국채를 매입해 장단기 국채 수익률 격차를 축소했다.
사라벨로스는 이번 바이백과 함께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직접 매도하는 대신 연준의 환매조건부채권(Repo·레포) 시설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을 장기금리를 억제하는 “완화된 형태의 금융 억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를 달러 체제의 결정적인 변화로 보는 데에는 신중론도 있다.
사라 잉 CIBC캐피털마켓 외환전략 총괄은 현재 상황을 과거 달러가 강한 압력을 받았던 시기의 축소판으로 평가했다. 2025년 4월 ‘해방의 날(Liberation Day)’ 당시 매도세나 올해 1월의 압력보다 강도가 낮다는 설명이다.
잉은 시장이 미국 정부의 의지를 시험한다기보다 베선트 장관이 시장을 시험하고 시장이 이에 맞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간선거 앞둔 시점도 주목…모기지 금리 낮추나
재무부의 조치가 미국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 나왔다는 점도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장기 국채 수익률이 하락하면 모기지 금리도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에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오스본은 휘발유 가격이 여전히 높고 모기지 금리도 상승하고 있다며 중간선거가 다가오는 만큼 행정부가 이를 해결하려 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금융 여건을 지나치게 완화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커질 수 있다. 이 경우 연준이 오히려 더 강한 긴축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있다.
잉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연준이 금리를 올리는 상황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패닉 대응처럼 보이면 신뢰 잃는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시장을 불안하게 만든 요인이 미국의 재정 수치 자체만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스티브 잉글랜더 스탠다드차타드 G10 외환리서치 글로벌 총괄 겸 북미 거시전략 총괄은 베선트 장관이 유동성이 낮은 시장 영역에 개입하는 방식이 투자자에게 즉흥적인 대응처럼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조치가 반복되면 시장에는 “패닉 대응”처럼 보이고 정책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잉글랜더는 달러의 장기적인 지지 기반까지 훼손됐다고 보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 금리와 생산성, 기업 이익 증가 등 경제 펀더멘털이 달러를 지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동시에 미국의 재정적자라는 부정적인 요인도 이번 조치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봤다.
잉글랜더는 이번 조치가 미국 경제의 생산성이라는 긍정적인 펀더멘털도, 재정적자라는 부정적인 펀더멘털도 바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 재무부의 바이백 확대를 둘러싼 논쟁은 국채 매입 규모 자체보다 장기금리 상승의 부담을 누가 흡수할 것인지에 맞춰지고 있다.
시장이 더 높은 국채 수익률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이를 억제한다면 달러가 조정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일부 외환시장 참가자들의 경고다. 발표 직후 금과 비트코인이 동시에 급등한 것도 시장이 이 가능성에 반응한 움직임으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