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국내 중소기업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동남아시아 등 세계 무대에서 한 개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주한 국경 간 무역 결제의 비효율성은 중소기업으로서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하다.
수입 업체가 현지 자국 통화를 달러로 환전해 송금하고, 이를 다시 원화로 바꾸는 전통적인 스위프트(SWIFT) 결제 절차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중개 은행을 거치며 길게는 일주일이 넘는 정산 지연이 발생했고, 4%가 넘는 높은 수수료 비용이 고스란히 기업의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더욱 뼈아픈 현실은 저개발국 바이어들과의 거래에서 나타난다. 라오스의 한 수입 업체는 1만달러 상당의 수출 대금을 한 번에 결제할 수 없으니 1000달러씩 열 번에 나누어 지급하면 안 되겠느냐고 간곡히 요청해온 사례도 봤다. 현지 은행에 달러화가 고갈되어 중소기업들이 암시장에서 값비싼 달러를 어렵게 구해야만 대금을 치를 수 있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국 통화로 결제할 능력이 충분함에도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역 거래 자체가 교착 상태에 빠지는 비극을 목도해야 했다.
이러한 참담한 한계를 마주하며 효율적인 결제 방안을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마침내 그 해답을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에서 찾게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이 완전히 디지털화되는 대격변의 흐름 속에서 전통 금융의 낡은 규율은 더 이상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해외 노동자들은 이미 가족에게 스마트폰 앱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사진 보내듯’ 송금하고 있으며, 남미의 시민들은 월급을 받자마자 가치 하락에 직면한 현지 화폐 대신 미국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USDT)으로 바꾸는 삶을 일상적으로 영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금융 편의성의 향상을 넘어, 돈의 근본적인 형태가 변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이자 블록체인이 이해하고 전송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향한 시대적 요구였다.
이러한 변화를 중소기업 또는 신생 스타트업 기업들이 주도할 수 있을까? 국경간 거래라는 고도의 금융 활동을 이들에게 맡겨도 될까? 중소기업들의 무역 결제 고충을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커다란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기술력으로 평가 받는다면 할 말이 없다. 대형 은행, 금융당국은 물론이고,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정부 산하 컨설턴트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하지 말라, 기다리라”였다. 국내에서 사업하면서 경험으로 배운 것은 기다리면 알맹이는 기존 대형사들이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대형 기술기업, 대형 금융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병이 반드시 필요하다. 미사일, 전투기, 구축함만으로는 전투에서 이길지언정, 전쟁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디지털 금융 영토를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각축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은행권 중심의 전통 금융 체계와 핀테크 기업의 혁신 역량이 서로를 배척해서는 절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두 진영은 각자의 주특기를 극대화해 국익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힘을 모아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있다. 디지털자산 기본법 입법 지연과 규제 공백 속에서, 유럽과 일본은 일찍이 관련 법을 통과시켰고, 미국 역시 작년 법안 통과와 함께 본격적인 스테이블코인 생태계 확장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엄중한 시국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국가적 화두가 있다. 지금은 ‘안’에서 우리끼리 분열할 때가 아니며, 다 함께 ‘밖’을 바라보며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수립이나 통화주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의 실물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안전한 법정화폐의 준비자산 예치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결국 자금세탁 방지(AML)와 자산 보호의 최고 역량을 지닌 한국은행이나 시중은행의 개입과 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발행 주체가 누가 되든 안전한 발행 제도가 구축된다면 종국에 시중은행과 컨소시엄을 구성하거나 어떤 단계에서든 긴밀히 협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가 주도하고, 누구에게 먼저 발행 기회를 줄 것인가”라는 제한적 사고에 함몰될 것이 아니라, 준비자산의 투명성과 공시 의무, 소비자 보호 체계와 같은 ‘질적인 기준’을 중심으로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고 배분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의 길 위에는 어떠한 기득권이나 서열도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우리 금융 당국이 안정성에만 매몰되어 발행 주체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영원히 디지털 달러 생태계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부는 은행 중심의 ‘안정성 모델’, 빅테크 및 자격을 갖춘 민간 기업의 ‘사용성 모델’, 그리고 혁신적 핀테크가 주도하는 ‘혁신성 모델’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허용해야 한다. 공정한 기회의 장 속에서 시장 경쟁을 통해 스스로 역량을 증명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그룹에 국가적인 역량을 결집해 주어야 한다.
새판을 짜는데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그것이 진짜 새판인가?
수출 대국인 대한민국이 디지털 화폐 주도권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고 글로벌 영토를 선점하는 미래는 정부와 전통 금융권, 그리고 핀테크 기업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밖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열릴 것이다. 기술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원석 피니버스 대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중소수출기업 무역결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는 핀테크 창업가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들과 현지 기업들이 국내 기업들과 무역을 할 때 겪는 애로 사항을 접하고 창업을 결심했다. 여성 건강 전문 기업 (주)질경이를 창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