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홍콩이 가상자산을 증권과 상품, 결제수단 등으로 나누는 분류체계부터 확정한 뒤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한 선례를 참고해 한국도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과 감독체계를 먼저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14일 여의도연구원은 최근 정책 보고서를 통해 미국 등 금융 선진국들이 실험 단계를 넘어 기존 자본시장 인프라의 블록체인 전환을 본격화한 사이 한국 정부는 기존 부동산·미술품 조각투자 등 핀포인트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꼬집었다.

내년 2월부터 토큰증권 발행을 허용하더라도 거래대금을 지급할 스테이블코인과 결제체계가 제도 밖에 머물면 금융혁신이 도중에 멈출 수 있다는 진단이다.

권승근 여의도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주식과 채권을 블록체인에서 발행·거래하는 토큰화가 자본시장 본류로 확산하고오 있다”면서 “원화 기반 거래질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시장을 개방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 의존도가 높아지고 내년 예정된 가상자산 과세도 집행에 혼선을 빚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원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은 이미 기존 자본시장 인프라의 블록체인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예탁결제원(DTCC)은 지난해 12월 기존 증권법 체계를 그대로 둔 채 보관 중인 증권을 토큰화할 수 있도록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3년간 규제 유예를 받아냈다.

DTCC는 이를 계기로 지난 7월부터는 러셀1000 구성종목과 주요 지수 상장지수펀드(ETF), 미국 국채 등 유동성 최상위 자산을 대상으로 실거래를 시작했고 오는 10월 중 토큰증권 상용화를 예고한 상태다.

규제 측면에서도 미국은 달러 패권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지급형 스테이블코인을 우선 규율하는 ‘지니어스(GENIUS)법’을 제정해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가상자산을 디지털 상품과 투자계약자산, 지급형 스테이블코인 등으로 명확히 구분해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와 SEC의 관할을 배분하는 ‘클래리티(CLARITY)법’을 추진하며 규제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클래리티법은 지난해 7월 하원을 통과한 뒤 상원에 계류 중으로 오는 15일 법안심사 절차 토론 종결을 위한 표결에 들어간다.

EU는 가상자산 통합법(MiCA)을 통해 가상자산을 전자화폐토큰(EMT)과 자산참조토큰(ART), 기타 암호자산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아울러 유로화 토큰이 단일 통화권 내에서 일평균 100만건, 2억유로를 넘어서면 발행을 축소하도록 하는 사용량 상한과 유럽중앙은행(ECB)의 인가 거부 의견권, 준비자산 통화 일치 의무, 이자 지급 금지 등 통화주권 방어장치를 함께 규정했다.

일본은 자금결제법상 법정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전자결제수단’으로 정의해 가상자산과 법적 분류를 아예 분리한 경우다. 토큰화 예금은 금융상품거래법이 아닌 은행법으로, 증권형 토큰은 금융상품거래법으로 각각 소관을 나눴다

다만 권 연구원은 “일본은 스테이블코인을 미국보다 먼저 법제화했으나 오랜 기간 엔화 스테이블코인이 부재했던 데 이어 금융청이 2027년 세제개정 건의로 신탁형 규제를 뒤늦게 완화 중”이라며 “일본 의 시장 대응은 속도감이 있지만 과잉 사전규제의 비용도 함께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홍콩은 지난해 8월 시행된 ‘스테이블코인 조례’를 통해 홍콩달러 연동 토큰은 역내·역외 발행을 불문하고 인가 대상으로 규정하고 무인가 발행 시 최고 500만 홍콩달러 벌금과 7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반면 국내 관련 제도는 동일한 규제 대상이 토큰증권(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스테이블코인(디지털자산기본법안), 지갑·중개(특정금융정보법), 전자지급수단(전자금융거래법) 등 서로 다른 법에 흩어져 있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권 연구원은 “동일한 규제 대상이 서로 다른 법으로 흩어져 충돌하거나 자의적 적용·해석의 여지가 있다”면서 “토큰 발행자가 유리한 법제를 골라 상품을 설계할 유인이 발생한다”고 평가했다.

한국예탁결제원이 지난 4일 발표한 토큰증권 분산원장 표준요건 가이드라인에 대해서도 하나의 증권을 하나의 원장에서만 발행·유통하도록 하고 있어 토큰증권과 스테이블코인 간 크로스체인 결제까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 점도 한계로 언급됐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토큰증권 정책방향’ 3단계 로드맵의 마지막 3단계인 스테이블코인 연계 온체인 결제 구현은 근거법인 디지털자산기본법 법제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내 스테이블코인 규율 체계 마련이 늦어지는 사이 이미 통화주권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넘어가고 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국내에서 원화로 매수된 스테이블코인은 약 86조원에 달하며 거의 대부분이 USDT(테더), USDC(서클) 등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해당한다.

권 연구원은 “온체인 결제가 허용되어 원화와 스테이블코인 간 직접 거래 경로가 뚫릴 경우 국내 원화 수요가 대거 미국 국채 수요로 전환될 위험이 크다”며 “이는 곧 원화 담보 시장의 공동화를 부르고 충격이 그대로 국내 외환시장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국제결제은행(BIS)도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99% 이상이 달러 표시로 ‘조용한 달러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연구원은 디지털자산기본법에 가상자산을 증권형(토큰증권), 원화 지급형(원화 스테이블코인), 외화 지급형(달러·유로·엔 스테이블코인 등), 기타(유틸리티 토큰 등) 4대 유형으로 명확한 분류 체계를 명문화하는 게 최우선 정책 과제라고 짚었다.

아울러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예탁결제원 등 관계 기관들의 권한과 경계 분쟁 판단 절차 또한 법에 명문화할 것을 제언했다.

가상자산 분류 체계를 수립과 함께 외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분기별 사용량 보고와 한국은행 의견청취를 우선 도입하는 모니터링을 선행한 뒤 사용량 상한 및 한국은행 의견 구속력 부여 등 단계적인 규제 강화 방안이 제시됐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KRWQ’처럼 역외 발행이라도 인가 대상으로 규정하고 준비자산의 원화 표시 자산 운용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또한 이자 지급 금지 의무를 발행자뿐 아니라 거래소·중개업자의 리워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연구원은 내년부터 시행될 가상자산 과세에 대해서는 과세 자체는 당연한 흐름이지만 실효적 집행의 한계를 이유로 유예를 검토해야 한다고 짚었다.

권 연구원은 “명확한 가상자산 분류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과세를 강행하면 스테이블코인 교환의 과세 여부나 증권형 토큰과의 세목 구분, 손실 이월공제 등 핵심 쟁점이 모두 미해결로 남는다”며 “해외 거래소나 탈중앙화금융(DeFi) 거래에 대한 추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자칫 국내 시장의 자본만 역외로 밀려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